우리집 참외농사의 내력.[역사]
오랜만에 사진을 뒤적이다 부모님이 참외농사를 짓을때 사진한장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주어릴때에는 성주하면 수박과 참외가 유명하였습니다
초등학교때에는 우리집에서는 부모님이 수박농사를 짓었다고합니다..
수박농사에서 참외농사로 바꾼지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이었습니다..
동내에서 참외하우스 농사짓으면 돈 많이번다니까 우리집에서도 참외하우스를 시작하였지요...

참외야기


지금으로부터 28년전에 부모님이 참외하우스앞에서 참외선별작업중에 밝으신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외모양을 모아서는 B품수준입니다 ㅎㅎㅎ
바닥에는 거적(집을 역어서만든것)을 깔고 거적위에 고무다라이에 물을받아서 손으로 하나하나 다 씻었지요..
그때에는 차광막이없어서 거적을 작업장위에올려 끈으로 고정시켜서 차광을 하였지요..
그때에는 상상도 못할만큼 변했고 참외의 육종과 시설의 현대화가 이루어졌지요.

참외이야기

 

부모님은 아주 열악한환경에서 참외농사를 짓어서 자식들 뒷바라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옴마 사랑한데이.....
지금까지 잘 살고있는거 다 부모님덕이라는것도 잘알고 있습니다.....

 


 

Posted by 성주참외이야기 참외 이야기


겨울 참외의 원조..
겨울참외외의 원조는  성주에서도 우리도흥리에서 전국에서 가장먼저 재배를 하였다.
지금 법타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는 노신환님이 1977년에  건축용자제(대서리)를  6m와 120cm를연결해서 지금의 하우스모양으로 설치를하고
비닐은 수입비닐(일산)PVC비닐과 국산비닐을 2중으로 씌우고  대나무를 잘라서 터널을만들고 그위에 터널비닐을 씌웠다고 한다.
지금은 성능이 좋은 보온덥게가 있었지만 그때에는 집으로 역은 거적을사용하여서 보온을하였다고 한다.
어려운점이 너무많았다고한다. 참외와 박을 접목하였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다보니 기술과 경험이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실패도 하였다고 한다.
참외담을 박스가없어서 코오롱(실담는박스)에서나오는 4*8박스를 사용하였는데 무개가 약30-40kg이었다고한다
참외를 출하때도 서울에 바로가는 화물차가 없어서 참외를 화물차로 김천고속버스터미널까지옮기고 다시 고속버스짐칸으로 서울까지 옮기고 다시용달로 개인청과에서 팔았다고한다.
1978년 1월20일 첫출하를 하였는데  참외 한박스에 11만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당시 땅1평에 2000~3000원에 거래되었다고하니 상상이 가지가 않는다..
1978년 구자춘씨가 도지사를 할때에 하루에 전국에서 관광차로 2-3대가 현장견학을 오기도 하였고. KBS, MBC, TBC.에서 전국방송을 타기도하였고.
1979년에는 경상북도 도청벽보에 경북의 자랑이라고 벽보에 노신환씨의 사진이 붙기도 하였다..
전만원(용암유서리), 김창원(문명)님이 먼저 대나무로 하우스를 만들어 로얄을 재배하였으나 지금처럼 겨울참외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 2년뒤에는 동네에서도 박성환, 노점태, 노근초, 노상필씨등이 기술을배워서 시작하였다고한다..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이
나만의 참외를 만들고 또한 공부도 많이하고, 무조건 부지런해야지 되고, 토론도 많이하고등등......
도흥리에 태어난것이 참으로 뿌듯하였다...
Posted by 성주참외이야기 참외 이야기